Chapter 6 신 존재의 증명 (귀납적 증거)
6.1 귀납적 논증에 의한 증명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두 번째 방법은, 가설 설정에 따른 귀납적 논증입니다. 귀납법이란,여러가지 정보와 증거를 수집하여 그것의 공통적인 속성을 발견해서 추론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사실의 진위를 검증하거나 확인하기 위한 방법론으로는 가설 설정에 따른 확률적 귀납 논증이 표준적인 방법으로 널리 이용됩니다.
6.2 귀납적 논증의 개념
가설 설정에 따른 귀납적 논증이라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인 혐의로 기소가 되었습니다. 판사인 여러분은 이 피고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과연 그 피고가 진짜로 살인을 저질렀는지 저지르지 않았는지 직접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초능력’을 발휘해서, 피고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당시를 직접적으로 재확인할 능력도 없고, 피고로 빙의해서 직접 그가 그 시간에 뭘했는지 ’직접 체험’하는 식의 ’확실한 검증’은 불가능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비록 불완전하지만 진위를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간접적인 증거를 수집해서 ’추정’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거 수집 단계 이전에 반드시 것이 한단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설 설정입니다. 자연 과학이건, 사회 과학이건, 모든 합리적인 연구 방법론에서 어떤 주제의 진위를 가리는 과정의 가장 첫단계에서는 진위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의로 ‘그것은 참일 것이다,’ 혹은 ‘거짓일 것이다’라는 ’가설’을 잡고 시작하게 됩니다.살인범의 예로 되돌아가면, 판사인 여러분은 수사의 가장 첫 단계에서, ’이 사람은 살인범이다’ 혹은 ‘살인범이 아니다’ 라는 가설을 최우선적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이후 순차적으로, 객관적인 증거나 조사를 통해서 이 가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를 가리게 됩니다.
실제로 살인에 이용된 흉기에서 지문과 혈흔을 감식했을 때 이것이 피고의 것과 일치하고, 동일한 시간에 피해자와 피고가 동일한 장소에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과 CCTV와 같은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확인된다면 우리는 ’피고는 살인범이다’라는 가설이 참임을 입증할 수 있지만, 반대로 지문과 혈흔이 다른 사람의 것이고, 동일한 시각에 피고가 다른 곳에 있었음이 확증된다면 ’피고는 살인범이다’라는 가설은 기각할 수 있고, 무죄를 선고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증거나 검증의 신뢰성’ 인데, 이는 통계적 혹은 수학적인 확률의 개념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예에서, 지문과 혈흔 감식에서 피고의 것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문과 혈흔이 피고의 것과 일치하므로, 이 사람은 살인범이 100% 확실하다’라고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증거 또한 ’간접적’이고 ’불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지문과 혈흔 감식은 정확도가 높은 검사이지만, 확률적으로 검사에 오류가 있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오류가 있을 사소한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지문 감식과 혈흔 감식의 정확도가 99%라고 가정한다면, 엄밀하게 말해 우리는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내린 결론의 신뢰도와 정확도 또한 99%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1%는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모든 증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알리바이건, 목격자의 진술이건, CCTV이건..어떤 증거이건 ‘불확실성’ 내지 ’오류’의 가능성은 존재하지요. 알리바이와 목격자의 진술은 증인을 돈으로 매수하면 허위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고, CCTV도 정교하게 조작이 이루어진다면 거짓 정보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지요.
‘직접적’이고’ 확실하고’, ‘100% 완벽한’ 그런 증거는 현실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체험한 증거’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간접적인 증거’로 바뀌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증거를 대봐’라고 해서 어떤 사실의 진위 여부를 검증했을 때, 이러한 증거에 의한 확실성이 ’100%’라고 무의식적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6.3 궤변론자들의 오류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합니다.
아무리 유전자 검사가 99% 확실해도, 1%는 믿을 수 없으니, 100% 완벽한 증거는 아니네? 그러니까 믿을 수 없네…왜? 100%가 아니니까
이런 논리에 바탕을 둔 궤변론자들이 흔히 물고늘어지는 억지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유전자 검사와, CCTV와, 다수의 목격자의 진술과, 정황증거와 기타 수많은 물증이 모두 피고가 살인범임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이러한 증거의 정확성은 99.9999999% 이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에 에러가 있고, CCTV와 목격자의 진술은 조작되었고, 기타 많은 물증 및 정황증거도 동시에 조작되었을 0.000000000001%의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증거는 100% 완벽하지 못하므로 믿을 수 없다.
이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합리적인 검증 절차에 따른 결론을 내리는 기준은 ’100% 완전무결한 논리적인 완벽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연과학에서 이루어지는 방법론에서조차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 기준이 논리적, 경험적 완벽성이 아닌, ’일정 수준 이상의 확률적인 신뢰도’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치명적인 오류 중 또 하나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이라는 것의 상대적인 비중을 똑같이 취급한다는 것인데요,
앞의 예에서 종합적인 증거의 정확성이 99%이고, 불확실성이 1%라면, 정확성은 불확실성보다 무려 99배나 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량적인 차이는 완전히 무시하고 단순히 ’불확실성의 존재’라는 단순한 기준하나만으로 99배나 신뢰도가 높은 증거를 믿을 수 없다라고 기각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도 이런 주장이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기 때문에 억지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연구 방법론에서 이루어지는 검증 절차에서 참 혹은 거짓임을 판단하는 기준은 ’100% 완전무결한 논리적 보장’이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확률적인 신뢰도’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5%, 좀 더 엄격한 기준에서는 1%보다 낮은 경우(이를 통계적인 유의 수준, p-value 라고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가 추론한 결론이 틀릴 가능성이 5% 나 1% 수준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일 가능성이 95% 혹은 99% 정도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보다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틀릴 가능성은 기각하고, 우리는 참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합리적, 과학적 사유를 추구하는 지성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수의 압도적이고 신뢰도 높은 증거를 제시해도 지극히 낮은 불확실성과 오류에 대한 가능성만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이런 근거로 다수의 압도적이고 신뢰성 있는 증거를 부정하려고 주장하는 행태는 궤변이자 억지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논리적’인 완벽한 진실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이런 이유 때문에 ’공상’에 빠진 궤변론자로 남을 수 밖에 없지요.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믿거나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은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믿고 있는 그 어떤 사실이나 진실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를 통해, ’그게 거짓일 가능성이 단 0.0000000000001% 도 없냐? ’라고 몰아부치면 끝이기 때문이지요.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됩니다.
6.4 진실을 찾아내는 합리적인 방법
요약하면, 우리가 어떠한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합리적, 과학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설을 세운다.
각종 증거나 연구,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한다.
검증한 결과를 취합하고 검증된 통계적, 확률적 신뢰성을 확인하고, 이 신뢰도가 특정한 수준이상이고,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특정한 수준보다 낮으면, 오류를 범할 사소한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함을 인정하지만, 그 가능성은 지극히 낮으므로 ’현실적’으로는 그 가능성을 ’무시’하고 우리가 검증한 가설이 ’진실’임을 받아들인다.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논리적으로 무결한 100% 확실성’이 아닌, 특정 수준 이상의 경험적, 확률적 신뢰도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신이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 때문에, 지극히 희박한 오류의 가능성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생떼를 쓰는 것은 ’무지’의 반증입니다.
6.5 상충되는 증거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여기까지 보셨다면, 과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진실을 가리는 방법이 기본적으로 어떤 것인지 개념을 잡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증거가 상충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A라는 목격자는 피고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B라는 목격자는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이지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판정을 해야 할까요? 피고가 범인인 동시에 범인이 아닐 수는 없지요? 논리적 모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가지 증거가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이 되는 경우에는 과연 어떤 방법을 통해 진실을 가릴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바로 위에서 설명드린 방법론을 조금 더 확장하면 됩니다. 상충되는 증거가 공존할 경우, 보다 강력하고 확실하고 개수가 많은 쪽의 증거가 신뢰성이 떨어지거나 개수가 적은 쪽의 증거를 상쇄시키게 되며, 이 때의 진위의 확실성의 정도는 ’수학적, 경험적 확률’로 표현되며, 가설 검증과 동일한 방식으로 검증합니다. 이는 통계학에서 ’베이즈 정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이즈 정리는 사후 확률을 통해 사전 사건의 확률을 추정하는 통계적 접근법입니다. 베이즈 정리에 의하면, 어떤 동일한 사실의 진위 여부를 지지하는 여러 개의 상반된 증거가 있을 때, 신뢰도가 여타 다른 증거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증거가 있거나, 혹은 여러 증거 중 참 혹은 거짓을 증거하는 증거의 개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면, 이러한 종합적인 요소가 다른 증거의 신빙성을 상쇄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법원에 10명의 증인이 소환되었습니다. 9명의 증인은 피고가 무죄임을 증거했고, 1명의 증인은 유죄임을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이 판사라면 어떻게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무죄임을 증거한 9명의 증인은 대단히 진실하다고 평판이 난 사람들이어서, 이 사람들이 진실을 말할 가능성은 90%이고, 거짓을 말할 가능성은 10% 였다고 합시다. 반면 유죄를 주장한 나머지 한 사람은, 거짓말을 달고 다는 사람이라, 진실을 말할 가능성과 거짓을 말할 가능성이 각각 50%라고 가정하겠습니다. 9명의 진실된 사람이 ’무죄’임을 증거했고, 나머지 1사람은 ’유죄’임을 증언한 이 상황에서, 실제로 이 피고가 유죄일 확률은 어떻게 될까요? 그 확률은, 실제로 유죄여서 위와같이 증언했을 확률 / (실제로는 무죄인데 위와 같이 증언할 확률 + 실제로 유죄인데 위와 같이 증언했을 확률)이 됩니다.
실제로는 무죄인데 위와 같이 증언(9명 무죄, 1명 유죄)했을 확률은 9명이 모두 진실로 말하고, 1명은 거짓을 말했을 확률이므로, 0.9^9 X 0.5^1 = 0.193 이고, 실제로 유죄인데 10명이 위와같이 증언했을 확률은, 그토록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9명이 모두 짜고 쳐서 거짓으로 증거하고,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던 1 사람이 참임을 증거했을 경우겠죠? 0.1^9*0.5 = 0.0000000005 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이 상황 즉, 9명의 진실한 사람이 피고가 무죄임을 증거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거짓임을 증거할 경우, 비록 1사람이 거짓임을 증거했을지라도, 절대 다수의 신빙성 있는 증거들은 그 사람이 유죄임을 강력하게 증거하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피고가 유죄일 가능성은 0.0000000005 / 0.1930000005 = 거의 0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판사라면 9명이 무죄를 이야기 했고 1명이 무죄를 이야기 했으니, 피고가 무죄:유죄일 가능성의 비율은 9:1 = 90% 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거의 100%에 가깝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1명의 거짓말쟁이가 유죄라고 우겨도, 여러분은 마음 편하고 단호하게 저 피고는 무죄요라고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이지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볼까요? 이제는 9명의 증인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해서 진실을 말할 가능성이 50%에 불과했지만, 마지막 증인 1사람은 진실을 말할 가능성이 99.999999999%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때, 9명의 증인이 모두 유죄라고 주장하고, 1명의 진실된 증인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무려 9명이 유죄라고 주장하고 1명만이 무죄임을 주장하지만, 9명의 발언은 대부분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유죄를 증거하는 수만 많다고 이 사람들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한 번 실제로 계산해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9명의 증인이 모두 유죄라고 주장하고, 1명의 진실된 증인은 무죄라고 주장했을 때, 실제로 유죄일 확률은 실제로 유죄인데 10명의 증인이 위와 같이 주장했을 확률/ (실제로 무죄인데 위와 같이 증언했을 확률 + 실제로는 유죄인데 위와 같이 주장했을 확률) 이 됩니다. 실제로 무죄인데 위와 같이 증언하는 경우는 9명은 모두 거짓을 말하고, 1명은 진실을 말하는 경우이므로 0.5^9 X 0.999999999 (거의 1) = 0.0019 이고, 실제로 유죄인데 위와 같이 증언하는 경우는 9명이 모두 참을 말하고, 진실하다고 믿었던 1명의 증언자가 거짓말을 하는 경우이므로 0.5^9 X 0.0000000001 = 0.000000000000001 이 됩니다. 따라서, 실제로 9명의 거짓말쟁이들이 아무리 모함을 해도, 이 사람이 유죄일 확률은 0.000000000000001 / 0.001900000000001 = 사실상 0에 가까움이 되지요.
이런 원리를 확률에 있어서의 ’베이즈 정리’라고 합니다. 베이즈 정리를 어떤 사건의 진위여부를 판정하는 통계적 신뢰도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은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너무나 뻔한 내용입니다.
어떤 사실을 지지하는 증거의 개수가 많을수록, 그것이 참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1가지 증거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10개, 100개 증거가 있을수록 참일 가능성이 높다.)
신뢰도가 높은 증거는 신뢰도가 낮은 증거의 신뢰도를 상쇄시킬 수 있다.(거짓말쟁이들 100명이 맞다고 주장해도 믿을 만한 진실한 증언 하나가, 100명의 거짓말쟁이들의 증거를 기각시킬 수도 있다.)
상충되는 증거들이 존재하는 경우, 진위 여부는 지지하는 증거의 상대적인 개수와 신뢰도에 의해 결정된다. 이 때의 수학적 확률이 진실임을 더 강력하게 증거하는 쪽을 진실, 혹은 거짓으로 결정할 수 있다. 단순히 상대방의 주장과 상반되는 것을 지지하는 증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한다.
6.6 끝없는 궤변
제가 이런 뻔한 결론을 ’베이즈 정리’라는 수학적인 개념에 더해서 시시콜콜한 계산식까지 보여주는 이유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반박한답시고 주장을 하는 것들의 상당수가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의 궤변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런 식입니다.
당신이 성경이 진실이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10가지 증거를 제시했고 나 또한 수긍한 바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어떤 무신론자들은 성경이 거짓이고, 하나님도 없다는 것을 지지하는 10가지 증거를 제시하더라.그런데 , 당신 주장이 정말 참이라면, 성경이 거짓이고 하나님도 없다는 증거는 없어야 되는 것 아닌가?참과 거짓은 공존할 수 없는데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이 거짓이라는 증거도 있으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성경과 하나님이 진실이라는 주장은 논리적 오류이다
이 궤변의 모순점을 지적하기에 앞서, 만일 그런 논리라면, 똑같은 방식으로 반박도 가능하지요.
무신론자들은 성경과 하나님이 거짓이라는 증거를 10가지 제시했는데, 나는 성경과 하나님이 진실이라는 10가지 증거를 알고 있다. 거짓과 참은 공존할 수 없는데 만일 성경과 하나님이 정말로 거짓이라면 참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참과 거짓은 공존할 수 없는데 유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실이라는 증거도 있으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성경과 하나님이 거짓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똑같은 논리인데, 똑같은 궤변입니다. 이 논리의 오류가 무엇일까요? 동일한 대상에 대해 참과 거짓은 상호 완전히 배타적이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가 참인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지요. 어떤 피고가 유죄인 동시에 무죄일 수 없듯이 말이죠. 하나님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피고가 유죄면 유죄고, 무죄면 무죄인 것이지요.
따라서, 앞서 제시한 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지지하는 증거 10개와 부정하는 증거 10개가 있는 경우, 지지하는 증거 10개가 모두 틀리거나, 부정하는 증거 10개 모두가 틀리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지하는 증거가 10개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그에 반대되는 부정하는 증거의 존재 자체는 지지하는 증거를 부정할 논리적인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10가지 증거가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증거하는 근거를 대야만 가능하지요.
베이즈 정리에 입각한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볼까요? 성경이 진실임을 증거하는 10가지 증거가 있고, 성경이 거짓임을 지지하는 증거 또한 10가지가 존재한다면,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성경이 진실임을 지지하는 증거들의 신뢰도와, 성경이 거짓임을 지지하는 증거들의 신뢰도를 서로 비교해서 어느쪽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은지를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성경이 진실임을 지지하는 여러 증거 중 한가지는 ‘예수님의 실존과 부활’이라는 증거입니다. 만일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허구적’ 인물이라면 성경 또한 허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다음으로, 성경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 중 하나는 ‘노아의 홍수’설화와 고대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와의 유사성입니다. 그들은 길가메시 서사시와 노아의 홍수 간의 유사성을 근거로 노아 홍수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베낀 짝퉁이므로 허구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예수님의 실존이라는 증거와 길가메시 서사시와의 유사성이라는 증거가 각각 어느 정도의 신뢰성으로 성경의 사실성 혹은 허구성을 증거한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분은 ’수학적’ 혹은 ‘과학적’ 실험으로 검증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임의로 가정한 ’경험적 확률’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 블로그의 성경의 역사성이라는 주제에서 상세하고 방대하게 다루겠지만, 예수님이라는 인물의 실존은 비단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고대 문서에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박해하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순교한 무수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지요. 인류의 역사를 구분짓는 BC와 AD의 기준 또한 예수님의 출생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는 내용은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굳이 세세하게 다루지 않아도, 너무나 뻔한 상식적인 증거들만을 바탕으로 했을 때,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 아니었는데 성경을 비롯한 다수의 고대문서에서 서로 정교하게 짜고 쳐서 가공의 인물로 만들어내고, 그런 가상의 허구의 인물을 목숨까지 바쳐 추종해서 로마 박해하에서도 집단적으로 순교하고, 그런 가상의 허구인물을 바탕으로 인류의 역사를 구분짓는 연도의 기준으로 삼았을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실존은 ‘성경의 진실성’을 대단히 높은 신뢰성으로 지지하는 ’한가지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실존이라는 단한가지 증거로 성경의 모든 내용이 참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라는 점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 길가메시 서사시의 경우는 어떨까요? 성경의 허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길가메시 서사시와 노아의 홍수의 내용상 유사성, 그리고 길가메시 서사시의 기록 연대가 성경보다 앞선다는 ’fact’ 분명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이 길가메시 서사시를 베낀 짝퉁 설화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근거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방식의 해석도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기록 연대가 앞선다는 사실이 반드시 그것이 표절을 의미하는 확증은 되지 못하며, 성경과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적 유사성이라는 것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에 양쪽에서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과 같은 전지구적인 홍수 사건이 있었음을 반증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요. 지리적으로 떨어진 지역에서 시간적으로 다른 세대에 고대에 동일하게 발생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라는 관점에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증거는 성경의 허구성을 지지하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는 성경의 진실성을 지지하는 증거로도 동일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장하는 사람의 시각과 어느 정도의 편견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증거는, 성경의 허구성을 증거하는 강력한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러프하게 따져보면, 이 증거의 신뢰도는 50%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앞서 설명드린 예수님의 실존성이라는 역사적 증거와 길가메시 서사시를 통한 성경의 허구성이라는 증거를 놓고 비교한다면, 예수님의 실존성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거짓일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고, 길가메시 서사시가 성경의 허구성을 지지할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나, 예수님의 실존성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거짓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나, 길가메시 서사시를 통한 성경의 허구성의 증거가 이를 압도할 정도의 강력한 증거는 결코 되지 못하기 때문에, 99.99999%의 신뢰성과 50%의 신뢰성이라는 증거를 놓고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는 합리적이고,과학적이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길가메시 서사시의 증거를 기각할 수 있습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성경과 하나님이 참이냐 거짓이냐? 에 대한 무수한 논란은 무수한 증거들에 의해 끝없이 발생하고 있는데, 정작 사람들은 개별적인 증거의 진위 논쟁에만 골몰할 뿐, 보다 근본적인 이런 최종적인 진위 판단의 근거가 되는 사고 방식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100가지 증거를 제시하면, ‘귀를 막고 있다가,’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할 단 한가지 증거가 나오면, 그 1가지 증거로 상대방의 100가지 탄탄한 증거를 한 번에 뭉갤 수 있다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 성경과 하나님, 예수님, 기독교에 관한 무수한 지지 증거도 있지만, 무수한 반박 증거 또한 있다는 것 저 또한 잘 알고 있고, 그 중의 일부는 저또한 과연 신과, 하나님, 예수님, 기독교가 사실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할 정도로 타당성 있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자신있게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며, 성경의 모든 내용은 진실임을 여러분께 강력하게 증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 성경의 진실성, 역사성,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논리적, 과학적, 역사적, 경험적, 체험적 증거 중 ’압도적’으로 신뢰성이 높은 것들이 즐비하며, 모든 증거들을 취합한 신뢰성은 하나님의 존재, 성경의 진실성, 역사성,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는 논리적, 과학적, 역사적, 경험적, 체험적 증거의 신뢰성보다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이를 기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살인사건에 대한 판결을 맡았을 때,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고, 피고의 살인 사건과 별 상관이 없는 매수된 무수한 어중이 떠중이 증인들이 아무리 위증을 해서 혼란을 준다고 할지라도, 조작이 불가능한 CCTV에서 생생하게 피고의 살인 현장이 그대로 찍혀있고, 현장에서 피고의 DNA와 일치하는 검체와 지문이 확인이 된다면, 어중이 떠중이 잡스런 위증이나 자질구레한 혼란스러운 증거들은 이러한 압도적으로 강력한 증거들에 의해 완전히 상쇄되어 버리지요. 자질구레한 혼란스러운 반증에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는 비록 검증과정에서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올바른 결론을 내리는데에는 별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결국해야 하는것은 모든 증거의 진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증거를 취합한 결과가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냐이기 때문이지요.
대체 당신이 그토록 압도적으로 강력하다고 주장하는 ’신의 존재’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는 이후의 글에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왜 하나님이 실재하시며, 성경과 기독교가 진실인지에 대해 최선을 다해 설명드리겠지만, 행여 제가 여러분을 설득하지 못하거나, 설령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성경이 허구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주장이나 근거가 있더라도, 단순히 그런 근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압도적으로 강력한 무수한 증거들을 부정하는 논리적 오류를 결코 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제게 불리해서가 결코 아니라, 이런 논증 자체가 논리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 궤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든 사실에 대한 진실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모든 증거에 대한 진실 또한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류의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수학적 진실인 베이즈 정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성적인 진실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오류의 가능성이 있고 해석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애매한 증거를 잡고 늘어지면서 진실을 흐리지 말고, 보다 뚜렷하고, 확실하고, 강력한 증거들을 취합해서 최종적으로 그것이 내리는 결론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이자, 그것이 이성적이고 수학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이지요. 나머지 어리버리한 잡증거들은 강력한 진실의 증거에 상쇄될 뿐입니다. 그런 자잘한 의문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실제로는 거짓인데 단지 아직은 왜 그것이 거짓인지 몰라 사실이라고 임시로 착각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6.7 신의 존재의 귀납적 증거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서 ’신의 존재’를 시사하는 귀납적인 증거가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신의 존재를 시사하는 귀납적인 증거로 ’우주의 미세 조정’과 ’인간의 도덕률’을 들 수 있습니다.
우선 ’우주의 미세 조정’이라는 증거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주의 미세 조정은 우주는 ’미세하게 조절된 정교한 규칙성’에 의해 유지되고 존재한다는 개념입니다. 시간이 시작되어 우주가 시작된 그 시점부터 우주의 모든 물질들은 정밀하게 조정된 법칙과 수치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물질을 서로 잡아당기는 중력이 없다면 행성도, 항성도 없고, 어떤 형태의 복잡한 유기체든 생성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강한 핵력이 없다면 원자핵에 양성자와 중성자를 잡아둘 힘이 사라지므로 원자 자체가 생성될 수도 없고, 화학물질이라는 것 또한 존재할 수가 없지요. 전자기력이 사라지면 화학물질 사이의 연결고리가 없어져 빛이 사라집니다. 이런 식으로 우주의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한 기본 법칙들 중 단 하나만 제거해도 생명체는 우주에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생명체라는 것은 무수한 물리적 상수에 의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세한 조정’에 의해서 세팅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강력한 증거는 중력인데, 중력은 140억 광년에 달하는 전 우주에 걸쳐 분포하고 있지만, 이 중력의 세팅을 단 1인치만 움직이게 되면 생명체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재앙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중력이라는 요소 또한 생명체의 탄생과 유지를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30여 가지 요구 조건 중의 단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인 우주 상수 또한 미세 조정의 강력한 증거입니다. 만일 공간이 너무 빨리 팽창하면 우주가 너무 급격하게 부피가 증가하여 생명체가 생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항성이나, 행성, 은하 등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되지요. 물리학자들은 우주 상수가 1/10^53 의 정확도로 조정이 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정확성을 비유로 하자면, 우주를 수백 마일 여행하다가 다트 하나를 지구에 던졌을 때, 직경 1/10^24 cm (0.000000000000000000000001 cm)의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는 수준입니다. 그 넓이는 원자 하나의 면적보다도 좁습니다. 30여가지 요구 조건 중 단 2가지, 중력과 우주 상수 2가지가 랜덤한 확률에 의해 모두 적절하게 조정되어 있을 확률은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 에 불과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신이 없다는 가정’하에 우주의 규칙성들은 초자연적은 정교한 지성적 존재가 아닌 랜덤한 프로세스에 의해 형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원인은 알 수는 없지만, 그 규칙성의 원인은 ’신’은 아닐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논증을 시작한 것이지요. 가설이야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설을 실제의 우주 상황에 적용해보니, ’랜덤한 확률’에 의해 현재의 우주와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그야말로 0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져 버린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귀납적인 논증법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까다로운 자연과학적 방법론에서도 오류의 가능성이 1% 미만이면 과학적인 사실로 인정을 하고, 오류 가능성이 단 1%만 초과해도 기각을 해버리는데, 랜덤한 프로세스에 의해 우주가 지배를 받고 있다라는 가정의 오류 가능성은 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 이상일 것이라는 결론이 나와버린 것이지요..진실일 가능성이 아니라, 오류 가능성이 5%, 10% 수준이 아니고, 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 이상이라는 얘기입니다.
무신론자와 자연주의자들은 생명체의 존재와 우주에 존재하는 무수한 규칙성과 정교한 상호 작용이 서로 무관하게 작용해서, 각각의 법칙이 정교하게 조정되고 상호 작용할 필요가 없기를 바랬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과학적 진실’에 의해 처참하게 발등이 찍혀버리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내는데 그게 바로 다중 우주론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수많은 우주의 하나에 불과하며 각각의 우주는 서로 다른 물리법칙과 불변량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즉, 지극히 희박한 확률을 합리화하기 불가능해지자, 무한히 많은 종류의 우주가 있으면, 무한히 많은 형태의 우주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중의 하나는 이런 종류의 우주도 있을 수 있지 않느냐? 라는 논리를 제시한 것입니다. 만일 우주가 단 하나라면,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완벽한 오류이지만, 우주가 무한개라면 우리가 존재하는 형태의 우주도 얼마든지 수학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요. 그래서 그들이 다중 우주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중 우주론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두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오류는, 우주에는 ’무한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라는 독립적인 증거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끼워맞추기식으로 ’가설’을 제시했지만, 그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검증이 불가능하고 증거가 없는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입니다. 단순히 ’제시’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사실’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요.
두 번째 오류는, 설령 그런 방식으로 우주가 존재한다고 쳐도 문제는 하나 더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한한 형태, 무한한 조합의 규칙성을 만들어내는 ’우주 생성기’의 정체는 대체 무엇입니까? 누가 만든걸까요? 결국 다중 우주론을 제시한다고 한들 우주의 근본적인 기원의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신론적인 관점이나 다중 우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을 보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합니다. ‘니가 지금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필연성’에 근거한 주장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는 미세 조정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놀라워 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지금과 같은 특정한 우주가 지어지지 않았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이 시점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확률적인 불확실성을 운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미 그렇게 희박함에도 이미 그런 현상을 겪고 있으니까
마치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지극히 희박해도, 만일 내가 지금 로또에 당첨되어 있으면 지극히 희박한 로또 당첨도 현실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냐?’ 라는 논리이지요.
그런데 이런 논리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마약 범죄를 저질러 체포되어 100명의 포수 앞에서 총살형을 당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가정합니다. 100명의 포수가 총을 쐈는데 총알이 다 비껴나가서 여러분이 죽지 않고 살아나갔다고 가정합시다. 여러분은 이 상황에서, ‘포수 100명이 정조준해서 총을 쏴도 과녁을 비껴나가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내가 총알을 한발도 안 맞고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니까.’ 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이것이 합리적인 생각입니까?
어떤 원인에 의해, 100명의 포수가 모두 의도적으로 여러분을 맞추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류의 논리적 오류는, 확률적으로 희박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의 발생 자체만으로 희박한 확률의 가능성을 결과론적으로 임의로 묵과해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식의 접근법은, 앞서 설명드린 가설 검정의 기본 원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요..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이 없다고 가정하면, 우주의 미세 조정은 물리적 필연성이나 우연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고, 신이 있다고 가정하면, 우주는 신의 정교한 디자인에 의해 설계되었다.
우주의 정교한 상수에 관한 수학적, 물리학적 증거는 우연에 의해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함을 반증한다. 따라서, 우주의 미세 조정은 우주는 물리적 필연성이나 우연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고 정교한 설계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6.8 도덕률이 증거하는 신의 존재
신의 존재를 시사하는 귀납적인 증거 중 또 한가지는 ’도덕률’을 들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국가와 시대 문화를 불문하고 보편적인 도덕률이 존재하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부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보편적인 커다란 가치들, 이를 테면, 사랑, 자비, 용서, 헌신, 정직과 같은 가치는 ’선’이라고 여겨지고, 살인, 폭력, 질투, 시기 등과 같은 가치는 ’악’이라고 여겨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보편적인 도덕률이나 선악에 대한 개념은 사회적 관습이나 교육에서 전적으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요. 왜냐면, 모든 사람이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살인을 미덕으로 교육받아도, 실제로 살인을 할 때 느껴지는 부정할 수 없는 죄책감과 양심의 존재는 ’보편적인 선악’이나 ’도덕률’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유물론적인 진화나 교육의 산물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무신론, 유물론적인 관점에서는 지성적이거나 선한 혹은 악한 신의 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 세상의 가치는 랜덤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이나 악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선이나 악의 개념 모두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 환경의 산물로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도덕을 ’인간 사회의 교육적 산물’이라고 규정합니다.
객관적 가치는 정말로 존재하고 우리 스스로가 깊이 성찰해 보면 그것이 단순한 진화나 교육의 산물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펼칠 수 있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객관적 도덕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
객관적 도덕 가치는 실제로 존재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6.9 요약 및 결론
지금까지 신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는 귀납적인 방법론과 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2가지 예(우주의 미세 조정, 도덕률)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다룬 신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는 연역적 증거를 함께 고려하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영역에서의 사유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적인 증거와 윤리학적인 증거들을 통해서도 역으로 신의 존재 가능성을 합리적인 신뢰도로 추정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확인했다면, 적어도 ’신’이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지지하는 것은, 단순히 못배우고, 무식하고, 과학을 모르는 광신적인 종교인들이 억지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유해보면, 단순히 자신이 똑똑하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막연하게 ’무신론’과 ’유물론’이 지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의 총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궤변은 조금은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이 글을 통해서, 적어도 완벽하게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못하더라도, ’막연한 무신론’이나 ’유물론’이 얼마나 억지스럽고 터무니없는지를 깨달으셔서, 적어도 ’신’이 어쩌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겠다는 정도의 생각의 변화를 일으키셨다면,다음 단계에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증거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과연 그 신이라는 존재는 막연히 뜬구름 잡는 수학과 물리학, 윤리학적 사유의 결과로만 검증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인간의 삶에서 직접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가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체험적인 증거는 없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 증거는 과연 없을까요? 바로 확인해 봅시다.